김민기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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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민기는 1951년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나, 1970년대 저항가요의 상징으로 불린 대한민국의 가수, 작곡가, 극작가, 연출가이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 '도비두'를 결성하여 음악 활동을 시작했으며, 양희은에게 곡 〈아침 이슬〉을 주면서 널리 알려졌다. 유신 정권 시절에는 작품이 금지되었으나, 이후 극단 학전을 설립하여 뮤지컬 《지하철 1호선》 등을 연출하며 활동했다. 그는 2007년 괴테 메달, 2013년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2018년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여받았으며, 2024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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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가수) | |
---|---|
기본 정보 | |
이름 | 김민기 |
원어 이름 | 김민기 |
로마자 표기 | Gim Min-gi |
한자 표기 | 金敏基 |
출생일 | 1951년 3월 31일 |
출생지 | 대한민국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
사망일 | 2024년 7월 21일 |
사망지 | 대한민국 경기도 고양시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
직업 | 가수 작사가 작곡가 뮤지컬 기획자 뮤지컬 연출가 뮤지컬 제작자 |
음악 활동 | |
장르 | 포크 록 |
악기 | 기타 |
활동 시기 | 1971년~2024년 |
수상 내역 | |
훈장 | [[파일:ROK_Order_of_Cultural_Merit_Eun-gwan_(2nd_Class)_ribbon.PNG|border|23px]] 은관문화훈장 (2018) |
기타 정보 | |
한국어 이름 | 김민기 |
한자 이름 | 金敏基 |
로마자 표기 | Gim Min-gi |
매큔-라이샤워 표기 | Kim Minki |
2. 생애
전라북도 이리시에서 태어나 중앙동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그는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서울로 이사하였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재학 중 ‘도비두’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노래 활동을 시작했다. 그 무렵 재동초등학교 동창인 양희은을 만나면서 〈아침 이슬〉을 주었고, 1971년에 발표했다.[24]
1972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우리 승리하리라〉, 〈해방가〉, 〈꽃 피우는 아이〉 등을 부르다 경찰서 연행되었으며, 그의 앨범 및 노래는 모든 방송에서 금지되었다. 이후 김민기는 시인이자 서울대학교 동문인 김지하와 조우했고, 야학 활동을 했다. 1973년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를 노동자들과 함께 공연했던 그는 국악인들과 교류하여 다음해 〈아구〉를 무대에 올렸다.[24]
1974년 군에 입대해 1977년 전역하였다.
1977년, 제대한 후 공장에서 일하다 양희은의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을 1979년 발표했고, 동일방직 노조 문제를 다룬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발표했다.[24]
1979년 12월에는 문화 체육관에서 공연을 펼쳤고 1983년에는 국립극장에서 탈춤과 판소리 등 소리굿 공연을 했다. 1987년, 탄광촌 이야기를 담은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발표했고, 1991년 학전(學田) 소극장을 개관했다. 그는 1993년에 22년 만에 독집 앨범을 발표했고 '겨레의 노래' 사업을 추진했다. 이후 뮤지컬 〈개똥이〉와 〈지하철 1호선〉 등 의욕적인 연출 활동을 했다.[24]
개관한 극장을 ‘학전블루소극장’으로 운영하고, 1996년 ‘학전그린소극장’까지 열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2010년 이후 공연 시장의 중심이 대극장 뮤지컬로 바뀌면서 대학로 소극장 관객은 점점 줄어들었고, 2013년에 그린소극장을 먼저 폐관했다.
학전은 재정난 및 김민기 대표의 위암 투병으로 인해 33년 만인 2024년 3월 15일에 폐업했다. 김민기는 1951년 3월 31일, 10남매 중 막내로 전라북도 이리시(현 익산시)에서 태어났다.[2] 그의 가족은 1963년에 서울로 이사했고, 그는 1969년에 서울대학교 미술학과에 입학했다.[3] 2024년 7월 21일 위암 악화로 사망했다. 향년 73세.[18]
3. 학력
4. 음악 활동
김민기는 1970년 양희은이 부른 아침 이슬을 작곡하여 주목받았다. 이 노래는 70년대 한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 김민기는 한국 민요와 팝 음악을 결합한 선구자이자,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활동가이자 당시 청년문화의 대표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했다.[4][5] 김민기의 노래는 한국 문화의 미국화를 비판하고 남북한 관계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그의 음악적 스타일은 1980년대 노래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4][5]
군사정권에 저항한 시인 김지하의 시를 음악으로 만들어 노래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된 양희은의 아침 이슬을 작사, 작곡했으며[19], 정부는 김민기의 작품을 검열 대상으로 삼아 1987년까지 유통을 규제했다.[20]
1979년 작곡한 상록수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는 1980년대 후반까지 민주화 운동 학생들의 애창곡 중 하나였다.[6] 1975년까지 9개의 앨범을 발매했지만, 이후 정부의 검열로 음악 활동이 중단되었다. 앨범은 매장에서 사라졌고, 라디오 방송이나 공개적인 장소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자신의 이름으로 음반을 발매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7][5] 1981년 영화 고래사냥의 음악을 작곡했지만, 검열에 의해 사용이 허가되지 않았다.[8] 이러한 금지는 1987년 6월 26일까지 계속되었고, 이후 모든 음악 활동에 대한 제한이 해제되었다.[7][5]
검열 기간 동안 김민기는 희곡 집필에 전념했고, 작품들은 1987년 이후 공연되기 시작했다. 학전이라는 극단을 결성하여 자신이 작곡한 뮤지컬을 공연했다. 독일 록 뮤지컬 라인 1을 각색한 작품은 1994년 초연되어 한국에서 1,000회 이상 공연되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도 공연되었다.[7]
1973년 이후 연극 연출에도 참여했고, 1990년대에는 지하철 1호선 등 여러 뮤지컬 제작과 대학로 소극장에서의 연출도 맡았다.[18]
4. 1. 가수 및 작곡가로서의 활동
서울에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재학 중이던 1969년, 김민기는 고교 동창 김영세와 함께 '도비두(도깨비 두마리)'라는 포크 밴드를 결성하여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24] 1970년에는 YWCA의 포크 동아리 '청개구리'에서 양희은을 만나 〈아침 이슬〉을 주었고, 이 곡은 1971년에 발표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24] 김민기의 노래는 당시 박정희 정권의 삼선개헌 시도와 맞물려 사회 변혁의 영향을 받은 저항 노래의 동태와 함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통기타 신드롬의 선두 주자로 꼽힌다.1971년, 김민기는 《김민기 1집 - 아하 누가 그렇게/길 (김민기 노래모음)》을 발표하며 솔로 가수 겸 작곡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 앨범은 대중음악계에서 기념비적인 앨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김민기의 노래는 현실 인식을 담백하게 담아내어 젊은 세대와 저항 세력에게 큰 인기를 얻었지만, 동시에 억압과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24] 1972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노래를 지도하다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되었고, 유신 정권 시절 그의 노래들이 저항 운동에 불리면서 보안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24] 그의 1집 앨범 수록곡 〈꽃 피우는 아이〉, 〈아침 이슬〉은 금지곡이 되었고, 앨범은 전량 압수되었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 이슬〉은 1970~80년대 저항 문화를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 잡았으며, 현재까지도 한국 정치사의 변혁적인 사건마다 불리고 있다.
1972년, 김민기는 양희은과 함께 〈백구〉, 〈새벽길〉, 〈작은 연못〉 등이 수록된 앨범을 발매하여 젊은 세대의 혁명적 낭만주의의 표상으로 떠올랐다. 1973년에는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 전국 순회 공연에 참여하며 노래 '금관의 예수'를 작곡했고, 1974년에는 소리굿 〈아구〉의 극본을 썼다.[24] 1975년, 당국에 의해 '아침이슬'은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는데, 장석주는 "금지곡들은 분명한 금지사유가 명시됐지만 이 노래에는 아무런 금지사유가 명시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라고 말했다.[29]
1977년 군 제대 후, 김민기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양희은의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1979)을 발표했고, 동일방직 노조 문제를 다룬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발표했다.[24] 1978년에는 '언더그라운드'에서 불법 인디 카세트 테이프로 〈공장의 불빛〉을 발매했다. 1979년 12월에는 문화 체육관에서 공연을 펼쳤고, 1983년에는 국립극장에서 탈춤과 판소리 등 소리굿 공연을 했다. 1987년에는 탄광촌 이야기를 담은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발표했다.[24]
1984년, 〈공장의 불빛〉 이후 활동이 금지되었던 김민기는 소작농으로 활동하던 중 문승현, 김창남, 김광석, 김보성 등 대학 노래패 출신 인사들과 함께 음반을 제작했다. 이들은 진보적인 성향의 곡은 정부 검열로 발매하지 못하고, 〈갈 수 없는 고향〉, 〈그루터기〉, 〈내 눈길 닿는 곳〉,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 등을 발표했다. 이 음반은 1970년대 통기타 문화의 젊은 세대들이 1980년대 대학 운동권에게 큰 지지를 얻었으며, 음반 제목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다.
〈늙은 군인의 노래〉는 김민기가 군 생활 시절 정년 퇴임을 앞둔 선임을 위해 작곡한 곡으로, 군 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으나 국방부에서 '군 사기 저하'를 이유로 금지했다. 이후 이 노래는 운동권 가요로 불리며 저항 세대의 교과서적인 노래가 되었다. 김민기는 JTBC 뉴스룸 인터뷰에서 "1980년 광주 민주화 항쟁 당시 군에서 금지되어 있던 이 곡을 진압군이 부르며 지나가는 모습이 뉴스에 슬쩍 지나갔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이 시위대가 저걸 투사의 노래로 불렀다. 두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노래라는 것이 참 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김민기는 1970년 작곡한 "아침 이슬"로 처음 주목받았다. 이 노래는 양희은이 불러 70년대 한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 김민기는 한국 민요와 팝 음악을 결합한 선구자이자,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활동가이자 당시 청년문화의 대표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했다.[4][5] 김민기의 노래는 한국 문화의 미국화를 비판하고 남북한 관계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그의 음악적 스타일은 1980년대 유행했던 노래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4][5] 1979년 작곡한 "상록수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는 1980년대 후반까지 민주화 운동 학생들의 애창곡 중 하나였다.[6]
그는 1975년까지 9개의 앨범을 발매했지만, 이후 정부의 검열로 인해 그의 음악 활동은 중단되었다. 그의 앨범들은 음반 매장에서 사라졌고, 라디오 방송이나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자신의 이름으로 음반을 발매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7][5] 그는 1981년 영화 고래사냥의 음악을 작곡했지만, 정부 검열에 의해 사용이 허가되지 않았다.[8] 이러한 금지는 1987년 6월 26일까지 계속되었고, 그때 그의 모든 음악 활동에 대한 제한이 해제되었다.[7][5]
군사정권에 저항한 시인 김지하의 시를 음악으로 만들어 1980년대 “노래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된 양희은의 “아침 이슬”을 작사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19], 정부는 김민기의 작품을 검열 대상으로 삼아 1987년까지 유통을 규제했다.[20]
4. 2. 1980년대 이후의 활동
1979년 12월 문화 체육관에서 공연을 펼쳤고, 1983년 국립극장에서 탈춤과 판소리 등 소리굿 공연을 했다. 1987년 탄광촌 이야기를 담은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발표했고, 1991년 학전 소극장을 개관했다.[24] 1993년에는 22년 만에 독집 앨범을 발표했고 '겨레의 노래' 사업을 추진했다. 이후 뮤지컬 〈개똥이〉와 〈지하철 1호선〉 등 의욕적인 연출 활동을 했다.[24]극장을 ‘학전블루소극장’으로 운영하고, 1996년 ‘학전그린소극장’까지 열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2010년 이후 공연 시장의 중심이 대극장 뮤지컬로 바뀌면서 대학로 소극장 관객은 점점 줄어들었고, 2013년에 그린소극장을 먼저 폐관했다.[25]
1984년 〈공장의 불빛〉 이후 활동이 금지되어 소작농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문승현, 김창남, 김광석, 김보성 등 대학 노래패 출신의 사람들이 김민기를 중심으로 모여 음반을 제작했다. 진보적인 성향을 포함한 곡은 정부 검열로 발매하지 못했다. 세상에 나온 곡은 〈갈 수 없는 고향〉, 〈그루터기〉, 〈내 눈길 닿는 곳〉,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 등이 있다. 이 음반은 당시 1970년 통기타 문화의 젊은 세대들이 1980년에 접어들며 더욱 활발해진 대학 운동권에게 큰 지지를 얻었다. 이 음반의 제목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다. 시민항쟁의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이 앨범 이후 발매한 안치환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는 약 장이 팔리는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군사정권 당시 음반 발매 및 음악 활동을 제재하였지만, 노태우 정권 시절 남북 공연단 교류 행사의 공연단 구성을 부탁받아 마지막 곡으로 쓸 〈철망 앞에서〉를 작곡하였다.
〈늙은 군인의 노래〉는 군인의 넋두리로 이루어진 가사로, 김민기가 군 생활 시절 정년 퇴임을 앞둔 선임을 위하여 작곡한 곡이다. 군 내에서 급속히 노래가 퍼져나가 국방부에서 '군 사기 저하'로 분류해 노래를 금지하였다. 이후 소위 운동권의 가요라고 불리며 저항 세대들의 교과서적 노래가 되었다. JTBC 뉴스룸 인터뷰에서 김민기는 "1980년 광주 민주화 항쟁 당시 군에서 금지되어 있던 이 곡을 진압군이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는 모습이 뉴스에 슬쩍 지나갔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이 시위대가 저걸 투사의 노래로 불렀다. 두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노래라는 것이 참 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990년 한겨레 신문사와 공동으로 음반과 공연, 노래 모음집을 한데 모은 〈겨레의 노래〉 사업을 지휘하였다. 김민기는 활동 금지 이후 음악 및 음반 발매 지휘만을 하였지만, 〈겨레의 노래〉에서 〈아침 이슬〉을 직접 불렀다.
1991년 학전에서 중국 조선족 창작 가곡, 동요를 모은 음반을 제작했다. 다양한 중국 교포들의 예술을 국민에게 선보여 민족적 정서 고취를 위해 기획하였다.
1993년, 김민기가 직접 노래를 부른 《김민기 1.2.3.4》 음반을 발매하였다.
LA 올림픽에서 순위에 들지 못한 선수들의 비극과 경쟁 사회의 그림자를 담은 MBC 다큐멘터리의 테마곡 〈봉우리〉를 작사, 작곡하였다. 올림픽의 빛과 그림자라는 다큐멘터리 주제를 당시 작가였던 송지나 작가에게 조언하였고, 송지나 작가는 테마곡 작곡을 부탁하였다.
1975년까지 9개의 앨범을 발매했지만, 이후 정부의 검열로 인해 그의 음악 활동은 중단되었다. 그의 앨범들은 음반 매장에서 사라졌고, 라디오 방송이나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자신의 이름으로 음반을 발매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7][5] 1981년 영화 고래사냥의 음악을 작곡했지만, 정부 검열에 의해 사용이 허가되지 않았다.[8] 이러한 금지는 1987년 6월 26일까지 계속되었고, 그때 그의 모든 음악 활동에 대한 제한이 해제되었다.[7][5]
검열 기간 동안 김민기는 희곡 집필에 전념했고, 그의 작품들은 1987년 이후 공연되기 시작했다. '학전'이라는 극단을 결성하여 자신이 작곡한 뮤지컬을 공연했다. 독일 록 뮤지컬 《라인 1》을 각색한 작품은 1994년 초연되어 한국에서 1,000회 이상 공연되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도 공연되었다.[7] 2007년에는 괴테 메달을 수상했다.[9]
5. 극단 '학전'과 공연 활동
1987년, 탄광촌 이야기를 담은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발표했고, 1991년 학전 소극장을 개관했다.[24] 그는 극단을 결성하여 자신이 작곡한 뮤지컬을 공연했다.[7] 1993년에는 22년 만에 독집 앨범을 발표했고 '겨레의 노래' 사업을 추진했다. 이후 뮤지컬 〈개똥이〉와 〈지하철 1호선〉 등 의욕적인 연출 활동을 했다.[24]
학전은 ‘학전블루소극장’을 운영하고, 1996년 ‘학전그린소극장’까지 열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2010년 이후 공연 시장의 중심이 대극장 뮤지컬로 바뀌면서 대학로 소극장 관객은 점점 줄어들었고, 2013년에 그린소극장을 먼저 폐관했다. 재정난 및 김민기 대표의 위암 투병으로 인해 33년 만인 2024년 3월 15일에 폐업했다.[25]
6. 작품
김민기는 1970년 양희은이 불러 70년대 한국에서 큰 인기를 얻은 "아침 이슬"을 작곡하여 처음 주목받았다.[4][5] 김지하의 시를 음악으로 만들어 1980년대 노래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고, 특히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된 양희은의 "아침 이슬"을 작사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9] 1979년 작곡한 "상록수"는 1980년대 후반까지 민주화 운동 학생들의 애창곡 중 하나였다.[6]
1975년까지 9개의 앨범을 발매했지만, 이후 정부의 검열로 인해 음악 활동이 중단되었다. 앨범은 음반 매장에서 사라졌고, 라디오 방송이나 공개적인 장소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자신의 이름으로 음반을 발매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7][5] 1981년 영화 고래사냥의 음악을 작곡했지만, 정부 검열로 사용이 허가되지 않았다.[8] 이러한 금지는 1987년 6월 26일까지 계속되었고, 모든 음악 활동에 대한 제한이 해제되었다.[7][5] 정부는 김민기의 작품을 검열 대상으로 삼아 1987년까지 유통을 규제했다.[20]
1973년 이후 연극 연출에도 참여했다.[18]
- 음반
- * 《김민기》 (1971)
- * 《김민기 1》 (1992)
- * 《김민기 2》 (1992)
- * 《김민기 3》 (1992)
- * 《김민기 4》 (1992)
- * 《아빠 얼굴 예쁘네요》 (1987)
- * 《엄마, 우리 엄마》 (1988)
- * 《Past Life Of 김민기 (6CD Box Set)》 (2004.10.21)
- * 《공장의 불빛》 (2004)
6. 1. 뮤지컬
김민기는 검열 기간 동안 희곡 집필에 전념했고, 그의 작품들은 1987년 이후 공연되기 시작했다. 그는 극단 '학전'을 결성하여 자신이 작곡한 뮤지컬을 공연했다.[7] 1990년대에는 <지하철 1호선> 등 여러 뮤지컬의 제작과 대학로 소극장에서의 연출도 맡았다.[18]제목 | 구분 | 연도 |
---|---|---|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 | 번안, 연출 | 1994-2008, 2018-2019 |
록오페라 <개똥이> | 작사/곡, 연출 | 1995, 1997, 2006 |
록뮤지컬 <모스키토> | 번안, 연출 | 1999, 2000, 2004, 2017-2018 |
뮤지컬 <의형제> | 번안, 연출 | 1998, 2000, 2001 |
학전어린이무대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슈퍼맨처럼-!>, <무적의 삼총사> | 번안, 연출 | 2004-2020 |
학전어린이무대 <그림자 소동> | 각색, 연출 | 2008 |
뮤지컬 <분홍병사> | 번안, 연출 | 2010, 2013 |
뮤지컬 <도도> | 극작, 연출 | 2010-2011, 2020 |
독일 록 뮤지컬 라인 1을 각색한 <지하철 1호선>은 1994년 초연되어 한국에서 1,000회 이상 공연되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도 공연되었다.[7]
6. 2. 연극 및 기타
- 소리굿 <아구> 극본 (1974)[7]
- 노래극 <공장의 불빛> 작사/곡 (1978)[7]
- 연극 <멈춰 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극본, 연출 (1983)[7]
- ‘겨레의 노래’ 총감독 (1991)[7]
- 학전어린이무대 <진구는 게임 중> 각색, 연출 (2008-2017)[7]
- 학전청소년무대 <복서와 소년> 번안, 연출 (2012-2014)[7]
- 학전어린이청소년무대 <유령놀이> 극작, 연출 (2014)[7]
- 영상노래극 <아빠 얼굴 예쁘네요> 극작, 연출 (2016-2020)[7]
김민기는 1973년 이후 연극 연출에도 참여했으며,[18] 1990년대에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 등의 제작과 대학로 소극장에서의 연출도 맡았다.[18] 그는 '학전'이라는 극단을 결성하여 자신이 작곡한 뮤지컬을 공연했다. 독일 록 뮤지컬 라인 1을 각색한 작품은 1994년 초연되어 한국에서 1,000회 이상 공연되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도 공연되었다.[7]
6. 3. 음반
- 《김민기》 (1971)
- * 친구
- * 아하 누가 그렇게
- * 바람과 나
- * 저 부는 바람
- * 꽃 피우는 아이
- * 길
- * 아침이슬
- * 그 날
- * 종이연 (혼혈아)
- * 눈길 (경음악)
- 《김민기 1》 (1992)
- * 가을 편지
- * 내 나라 내 겨레
- * 두리번거리다.
- * 꽃 피우는 아이
- * 아침 이슬 - 연주곡
- * 아침 이슬
- * 잃어버린 말
- * 아름다운 사람
- * 그 날
- * 친구
- * 잘가오
- 《김민기 2》 (1992)
- * 새벽 길
- * 나비
- * 길
- * 혼혈아
- * 그 사이
- * 고향 가는 길
- * 철망 앞에서
- * 눈산
- * 차돌 이내몸
- * 아무도 아무데도
- * 바다
- 《김민기 3》 (1992)
- * 상록수
- * 기지촌
- * 가뭄
- * 식구 생각
- * 서울로 가는 길
- * 늙은 군인의 노래
- * 강변에서
- *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연극 '금관의 예수'중에서)
- * 소금땀 흘리흘리, 땀 흘려 거둔 음식 (노래극 '개똥이'중에서)
- 《김민기 4》 (1992)
- * 봉우리
- * 아하, 누가 그렇게
- * 백구 (노래 : 이지윤[26])
- * 작은 연못 (연주곡)
- * 날개만 있다면 (노래극 '개똥이'중에서)
- * 작은 연못
- * 인형 (노래 : 이지윤[26], 김민기)
- * 고무줄 놀이
- * 천리길 (노래 : 이지윤[26], 윤주현[27], 김두현[28], 김민기)
- 《아빠 얼굴 예쁘네요》 (1987)
- 《엄마, 우리 엄마》 (1988)
- 《Past Life Of 김민기 (6CD Box Set)》 (2004.10.21)
- 《공장의 불빛》 (2004)
김민기는 1970년에 작곡한 "아침 이슬"로 처음 주목받았다. 이 노래는 양희은이 불러 70년대 한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 김민기는 한국 민요와 팝 음악을 결합한 선구자이자,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활동가이자 당시 청년문화의 대표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했다.[4][5] 김민기의 노래는 한국 문화의 미국화를 비판하고 남북한 관계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그의 음악적 스타일은 1980년대 유행했던 노래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4][5] 1979년 작곡한 "상록수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는 1980년대 후반까지 민주화 운동 학생들의 애창곡 중 하나였다.[6]
그는 1975년까지 9개의 앨범을 발매했지만, 이후 정부의 검열로 인해 그의 음악 활동은 중단되었다. 그의 앨범들은 음반 매장에서 사라졌고, 라디오 방송이나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자신의 이름으로 음반을 발매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7][5] 그는 1981년 영화 고래사냥의 음악을 작곡했지만, 정부 검열에 의해 사용이 허가되지 않았다.[8] 이러한 금지는 1987년 6월 26일까지 계속되었고, 그때 그의 모든 음악 활동에 대한 제한이 해제되었다.[7][5]
7. 평가 및 영향
김민기가 작곡하고 부른 노래는 힘들고 지친 빈민층을 사랑하고 그들을 대변하는 곡들이 많다. 그의 곡 〈아침 이슬〉은 1970년대의 저항가요였지만, 1990년대까지 오면서 20여 년 동안 그 민주정신을 이었다고 평가받는다.[24] 김민기는 1970년에 작곡한 "아침 이슬"로 처음 주목받았다. 이 노래는 양희은이 불러 70년대 한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 김민기는 한국 민요와 팝 음악을 결합한 선구자이자,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활동가이자 당시 청년문화의 대표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했다.[4][5] 김민기의 노래는 한국 문화의 미국화를 비판하고 남북한 관계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그의 음악적 스타일은 1980년대 유행했던 노래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4][5] 1979년 작곡한 "상록수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는 1980년대 후반까지 민주화 운동 학생들의 애창곡 중 하나였다.[6]
1975년까지 9개의 앨범을 발매했지만, 이후 정부의 검열로 인해 그의 음악 활동은 중단되었다. 그의 앨범들은 음반 매장에서 사라졌고, 라디오 방송이나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자신의 이름으로 음반을 발매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7][5] 1981년 영화 고래사냥의 음악을 작곡했지만, 정부 검열에 의해 사용이 허가되지 않았다.[8] 이러한 금지는 1987년 6월 26일까지 계속되었고, 그때 그의 모든 음악 활동에 대한 제한이 해제되었다.[7][5]
검열 기간 동안 김민기는 희곡 집필에 전념했고, 그의 작품들은 1987년 이후 공연되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학전'이라는 극단을 결성하여 자신이 작곡한 뮤지컬을 공연했다. 독일 록 뮤지컬 라인 1을 각색한 작품은 1994년 초연되어 한국에서 1,000회 이상 공연되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도 공연되었다.[7] 2007년에는 괴테 메달을 수상했다.[9] 한국 군사정권에 저항한 시인 김지하의 시를 음악으로 만들어 1980년대 “노래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된 양희은의 “아침 이슬”을 작사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19], 정부는 김민기의 작품을 검열 대상으로 삼아 1987년까지 유통을 규제했다.[20] 1973년 이후로는 연극 연출에도 참여했고, 1990년대에는 『지하철 1호선』 등 여러 뮤지컬의 제작과 대학로 소극장에서의 연출도 맡았다.[18]
8. 수상 경력
년도 | 시상 기관 | 부문 | 수상작 | 참고 |
---|---|---|---|---|
1995 | 한국평론가협회, 백상예술대상 | 연극상, 음악상 | 개똥이|개똥이한국어 | |
1996 | 서울연극제 | 특별상 | 지하철 1호선|지하철 1호선한국어 | |
1998 | 한국연극협회 | 98 우수공연5 단체상, 번안상 | 의형제|의형제한국어 | |
1999 | 동아연극상 | 작품상 | 의형제|의형제한국어 | |
2000 | 한국뮤지컬대상 | 특별상 | ||
2001 | 백상예술대상 | 연극부분 대상 및 연출상 | 의형제|의형제한국어 | [12] |
2003 | 제1회 외신공로상 | 공연부문 | 지하철 1호선|지하철 1호선한국어 | |
2005 | 파라다이스 문화재단 | 파라다이스상 | ||
2007 | 괴테 인스티투트 | 괴테 메달 | [2] | |
2008 | 대한민국연극대상, 서울어린이 연극상, 월간 한국연극 | 아동청소년연극상, 우수상, 2008년 공연베스트 7 | 고추장 떡볶이|고추장 떡볶이한국어 | |
2009 | 월간 한국연극 | 2009년 공연베스트 7 | 무적의 삼총사|무적의 삼총사한국어 | |
2010 | 월간 한국연극 | 2010년 공연베스트 7 | 분홍병사|분홍병사한국어 | |
2013 | 한국대중음악상 | 특별분야 공로상 | [13] | |
2013 | 장애인먼저실천상 | 우수실천상 | 슈퍼맨처럼-!|슈퍼맨처럼-!한국어 | |
2014 | 제11회 아시테지 연극상, 한독협회 제8회 이미륵상 | |||
2016 | 월간 한국연극 | 2016 공연 베스트 7 | 우리는 친구다|우리는 친구다한국어 | |
2018 |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 은관문화훈장 | [14] | |
2020 | 호암재단 | 호암상 예술상 |
9.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배우자 | 이미영 |
장남 | 김종화 |
첫째 며느리 | 최윤지 |
차남 | 김소윤 |
둘째 며느리 | 안신영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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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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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씨, 독일 최고 문화훈장 '괴테 메달'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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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플라이·싸이 '화려한 귀환'…인디·비주류 음악 대중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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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음악/한국음악/한국의_서양음악가/대중음악가/김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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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전 이끈 ‘아침이슬’ 김민기 별세…향년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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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음반 참여 경력 (1991-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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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잉크로 쓰인 신화, 김민기와 '아침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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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밭' 대학로 소극장 이끈 김민기 별세…향년 73세(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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